(선교사들의 생애)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H.G.Underwood 1859-1916, 향년 58세)
(“양화진 선교사 열전” 전택부 저에서 발취)
1. 언더우드의 아들은 “원한경 박사”. 장손은 ‘원일한씨“.
2. 1859년7월19일에 런던에서 6남매중 4남으로 출생
(5세시 어머니 별세, 13세시 아버지 따라 미국에 이민)
3. 1877년 19세시 뉴욕 대학에 입학, 1881년에 뉴부런스위크 신학교에 입학, 1984년에 졸업, 목사 안수 받음.
4. 1884년7월 미 북 장로교 선교부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 그 해 12월16일에
S F를 떠나 1885년 1월에 일본에 도착함.
5.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27세)는 “아펜설라”부부와 함께(3명)
인천 제물포에 입국함.
6. 1885년 후반기에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1886년 고아원과 고아 학교를 설립
(고아 한분이 성장하여 후일에 새문안 교회 장로가 되었고, 그 분이 김규식박사)
7. 언도우드는 한국어가 능숙하여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성서”를 번역 하였으며, 1897년에는 ‘크리스챤 신문“을 창간 하였고, ”찬송가“도 번역함.
8. 1889년에 “홀튼”과 결혼 하였음.(Horton은 의사로써 “명성황후”의 시의)
9. 계속하여 선교에 힘을 쓰면서 청소년 지도자로, ‘경신학교“ 초대 교장, ’YMCA” 를 창설, ‘연희전문’을 설립하였음.
10. 31년 한국선교에 헌신하고, 1916년10월 12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11. 아들 “원한경 박사는 연희 전문학교 교장으로, 해방 후에는 연희 대학교 총장으 로 봉직 하였고, 1949년 부인은 공산당에 의해 피살 당함.
12. 외국인 묘지인 “양화진”에 “언더우드, 원한경, 원일한” 3분의 묘지가 있음.
13. 연세 대 에 1928년 4월 24일 “언더우드 동상”이 세워 졌으며, 그 후에 파괴 되어 1955년 4월22일에 세 번째로 세워짐.
아펜젤라 선교사의 생애
(H.G. Appenzeller, 1858-1902, 향년 45세)
1. 1858년 2월 6일에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 함.
(선조는 독일 루터교회에 속했음)
2. 1882년에 “플랭클린 dosemaktif 대학을 졸업학, 그 후에 두루 신학교를 졸업하 여, 1884년에 2월2일에 ”파룰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에 조선 선 교사로 임명을 받음.
3. 1885년에 “Ella Dodge"와 결혼하고 바로 한국을 향하였음.
4. “스크랜톤 박사 부부(의사 선교사)와 함께 일본에 도착 하였고, 언더우드 선교사 와 함께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한국 제물포에 도착 하였음.
“오! 하나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 하였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쇠 사술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쇠사술을 끊으 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괌명과 자유를 얻게 하여 주소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라 부부.
이 편지는 미국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 임)
5. 당시 “언더우두” 선교사(독신)는 서울에 입성 했으나, “갑신 정변”이 일어난지 4 개월 전이여서 혼란으로 “아펜젤라” 선교사는 부인을 일본에 두고 “스크랜턴”선 교사와 함께 단신으로 1885년 5월3일에 서울에 도착 함
6. 1886년 6월8일에 “배재 학당”을 개교 하였고(처음 학생 2명-최초 의 근대식 교 육 기관), 1887년10월9일에 “정동 감리교회”를 창립 하였음. 1896년 10월26일 에 벽돌 예배당을 신축(최초의 예배당), 1899년의 교세는 어린이 포함하여 600 여 명이 되었음(장년 352명, 어린이 250명)
7. 1900년5월17일에 정동교회에서 “선교회 총회”가 모임(한글 신약 성경을 분배)
8. “아펜젤라”선교사는 조선의 여러 지방을 순회 하면서 한국 문화를 연구 하였음
9. 그는 “민주 독립운동”을 적극육성하고,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조직하여 유 명 강사(서재필, 윤치호, 신흥우, 여운형, 이상재 등)를 초청하여 강연 하였음.
10. 문서운동과 성서 번역에 힘을 씀.(1897년2월2일에 “조선 그리스도 회보”를 창 간하였고, “천로역정, 사민필지”를 출판) 성서번역을 하였음(1887년에 “마가 복 음서”를 발행) 1890년에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함께 “성서 번역 위원회”를 조직 하였음.
11. 애석하게도 1902년 6월11일 밤에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 위원회”에 참석 하기위하여 배를 타고 가다기 다른 배와 충돌하여 45세 로 생명을 잃음.(다른 증언에 의하면 동려의 생명을 구하려고 애Tm다가 배와 함께 침몰 했다는 기록 도 있음)
12. "아펜젤라“에게는 1남3녀가 있었으며, 아들이 1920년1월에 배재학당의 4대 교 장이 된 ”아펜젤라 2세“(Henry D. Appenzeller) 임(1919년 3월에 일어난 3.1 운동시에 학생들이 가담하여 학교가 폐교 당하기도 하였음) 1939년에 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에거서 1953년12월1일에 뉴욕 감리교 병원에서 별세함.
13. “아펜젤라 2세”는 유언 “내가 죽으면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말대로, 1954년 10월18일에 그 유해를 맞이하여 정동교회에서 장례식(2.000여명 참석)을 하고, “양화진”에 안장, 묘비에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명기 33:27)”라고 기록 되어 있음.
14. 장녀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라(Allice R. Appenzeller)"는 1885년 11월8일에 한국에서 출생, 1909년에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한국에 옴.
독신으로 “이화 학당” 교수로, 1922년에는 제6대 “이화 학당 당장”으로, 1925 년에는 “이화 전문학교” 교장이 되였음.
15. 1935년에 “신촌 대지”를 구입하고, 새 교사를 신축하였음. “앨리스”교장은 1939년에 18년간 교장의 일을 마치고, “김환란”을 교장으로 세움.
16. “애리스”는 1950년2월20일 교내 “채풀” 설교시 “반석위에 집을 세우라”는 말 씀을 선포하면서 쓰러져 “이화 대학교” 명예총장“으로 향년 6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심.
백정 전도의 개척자 무어 선교사
(모삼율, Samuel F. Moore 1846-1906, 48세 향년)
1. 무어 선교사 묘비에(1892년에 내한-1906년에 별세)
“조선 사람을 사랑 하였고,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기를 원 하였다, 이제 저희 수 고를 마치었으니 또한 그 행한 일을 따라야 할 것이다.”
* 영문에는 “Dedicated Servant of Jesue Christ"(예수의 충복)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2. 무어 선교사는 1946년 미국에서 태어 났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 하였고, 46 세 1892년에 그의 아내 “Rose Ely"와 함께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하였음.
3. 내한 하자마자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여, 6개월 만에 한국어로 대화하고, 교회 에서 설교 하였음.
4. 힘써 전도하여 8년 동안에 25개의 예배처를 세웠고, 850여 명 신자를 확보 하 였음. 어느 해는 1년에 100여 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음.
5. 무어 선교사는 1893년에 “곤당골 교회”를 세움(승동교회 모체)
6.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
“사회적 계급”은 “양반, 중인, 상인, 천인”의 4계급이 있었으며, 밑 바닥인 천인 주에는 “공천인, 사천인”으로 구분 되어 있음. 공천인(양반 시중)에는 “기생, 나 인, 노비, 역졸”이 있고, 사천인(사가 시중)에는 “노비, 중, 창기, 매복(점 쟁이)” 이 있음. “천인” 중에는 “기생, 무당, 광대, 포졸, 갖비치(신발 수선), 백장(백정- 도살 업)” 이 있었음. “백정”은 “소, 돼지”를 죽여 고기를 파는 “도살 업자‘로 사회에서 천대를 받었음.
7. 1894년 “백정” “박성춘”은 사회에서 천대를 당하여 사는 중에 “열병”으로 고생 하던 때 궁중 시의 인 “애비슨”선교사의 치료로 낳음을 받고 그 사랑에 감동하 여, “곤당골 교회”에 나가게 되어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음.
8. “박성춘”은 열심히 신안 생활을 하여 1895년에 “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박 었으며, 교회에 신자들이 모여 20명이 되었습니다.
9. 교인들은 백정인 박성춘과 함께 예배를 드릴수 없어 무어 선교사에게 항의 하였 으나 무어 선교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의견을 무시하게 되 니 일부 신자들이 분열하여 “홍문동 교회”를 세우게 되었음.
10. 1895년 “홍문동 교회”는 잘못을 뇌우치고, 두 교회가 합하여 “중앙교회”(후일 에 승동 교회로 발전)를 세움.
11. 4년 후인 1898년에 중앙교회는 108명으로 교회가 부흥하였고, 그 중에 백정들 이 30명이 되어 최초로 주안에서 인권을 초월하여 한깨 예배드리는 역사가 이 루워 젔음. 무어 선교사는 500년간 천대 받었던 “백정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음.
12. “박성춘”은 계속 뜨거운 열정으로 “백정들” 수 백명 전도하여 신분을 회복 하여 주었고, 그 이 후에 “독립 운동 협회”(1898.8.28. 윤치호 회장, 이상재 부회장)에 가입하여 왜정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에도 활동 하였음.
13. 박성춘은 신자가 된 11년 후 인 1911년에 “중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음.
아들 “박서양”은 신학문을 배워 1908년 “제중원 의학교”(현 연세대 의대)를 졸 업하여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와 의대 교수”가 되었음. 하나님의 축복임.
14. 그러나 당시에 “백정의 무시, 왜정의 폭정”을 참기 어려워 1914년에 “북 간도” 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병원과 숭의학교”를 세우고 전도와 육영사업에 힘쓰다 가, 아버지 “박성춘 장로”는 1916년에 북간도에서 사망 하였고, 아들 “박서양” 은 1935년에 사망 하였음.
15. 무어 선교사는 모든 박해를 극복하면서 전도에 힘을 썼고, “평양 신학교”에서 교수, 1906년12월22일 48세로 “제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심.
(이기홍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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