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5일 목요일

(신안 간증) (3) 회고록 - 아현 성결교회 사역


아현 성결교회의 사역
 
아현교회의 역사.
 
1964년 4월, 7년간의 육군 군목(대위)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부임한 민간교회가 당시 51년의 역사(2008년 현재는 97년의 역사) 를 가진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에 있는 아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1913년에 창립되어 무교동에 있었던 중앙교회와 함께 성결교회를 상징하는 교회입니다. 필자가 훌 타임 전임 부목사로 부임 한 것은 성결교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 이었습니다. 필자가 부목사로 부임한 후 중앙교회에 친구 되는 장자천 목사가 두 번째로 전임 부목사로 부임 하였습니다.
아현교회 역대 담임 목사로는 1대-강신영 목사, 2대-김상준 목사, 3대-이명직 목사, 4대-김준규 목사, 5대-한익찬 목사, 6대-김응조 목사, 7대-김병선 목사, 8대-최석모 목사,(납북) 9대-이헌영 목사, 10대-오영필 목사,(필자 부목사),11대-정승일 목사, 12대-이성환 목사, 13대-이정익 목사, 14대-조원근 목사(현재) 등입니다.
부목사로는 1대-김성호 목사(Part Time), 2대-이기홍 목사, 3대-이대섭 목사, 4대-이치영 목사, 5대-고남철 목사 이며 그 후로는 많은 부목사들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여전도사로는 전혜완 전도사, 홍종례 전도사, 강금선 전도사, 이군자 전도사 입니다.
 
충정로 3가 35번지는 성결교회를 상징 하는 지역으로 서울 신학 대학. 동양 선교회(O. M. C.-Oriental Mission Society) 선교사 주택. 그리고 아현 교회가 있었습니다. 아현교회는 “길보른 기념교회”로 창문이 적은 아치식 교회입니다. 건축 당시 서울신대 교내 또는 밖에 건축하느냐에 논의가 있었으나 재정 형편상 구내에 건축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교외에 건축 하였으면 교회가 더 발전 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후에 아현교회(조원근 목사)는 구 서울신학대학을 구입 하였고 그 건물을 “선교 문화 회관”으로 사용 하고 있으며, 앞으로 본당을 선교사들이 살고 있었던 대지에 건축할 계획입니다.
 
O. M. S. 선교부.
O.M.S.선교부는 성결교회 창립부터 한국 성결교회를 도운 선교 단체로 그 당시 “에드윈 길보른”(서울 신학대학 학장). “엘마 길보른”(세계구호위원회 총재), “헌트(한도성)”(서울 신학대학 교수), “제이비 크라우스”(선교부 재정 총무), “산도스”, “바올 헤인스”선교사들이 크게 한국 성결교회를 위하여 헌신 했습니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골프를 치고 대천 해수욕장에 가서 휴식 하는 일에 필자는 거부 반응을 가젔으나 1979년 미국에 이민 와서 30여년 살면서 “골프와 수영”은 생활 양식 임을 알고 당시 문화의 차이점을 깨달았습니다. 아현교회가 구내에 있기 때문에 교수들께서 설교도 하였으며
서울 신학대학 학생들도 교회에 출석 하였습니다. 대학 강의실이 교회 1층에 있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주일 학교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서로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서울 신학대학의 행사가 있을 때는 아현교회 신자들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교부에서 “영어통역”으로 수고 한 분들은 이원희 목사(전. 벨리 동양선교교회 담임) 박광철 목사(전. 동양선교교회 담임) 등입니다. 이위영 목사(전 로간 동양선교교회 담임) 등이 기억 되고 있습니다.
 
서울 신학대학의 추억.
교회 옆에 있었던 서울 신학대학 여자 기숙사에는 여학생들이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교내를 다녔으며 당시 여자 기숙사 사감으로는 전혜완 전도사, 배가례 전도사께서 수고를 하였습니다. 교회 바로 옆에 이명직 학장의 관사가 있었으며, 이명직 목사께서 강의실에 왕래 할 때에 모든 학생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이 존경 하였습니다. 이명직 목사께서는 설교 시 또는 강의 시에 “수학 중에는 신문도 보지 말고 저축도 하지 말고 이성교제도 조심하고 세상 바라보지 말고 오직 다시 오시는 예수님 만 을 바라보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서울 신학대학을 충정로에 세운 당시에는 서울의 명 건물로서 수세식이 있는 현대식 건물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입학한 학생들이 수세식 화장실에 휴지를 사용 하지 못하여 고장이 나서 화장실이 1층 먼 곳에 설치되어 필자가 1953년-1957년까지 공부 하는 동안에 화장실 사용이 제일 불편 했습니다. 붉은 벽돌의 5층 건물은 지금도 아현동을 지나면 보이는 유명한 건물입니다. 이 건물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여 목사가 되므로 한국의 3대 교파중의 하나인 “한국 기독교 성결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아현교회에서의 특별한 사역.
1. 1964년에 장년이 350명에서 450명으로 증가 하였고 유년부는 400명, 중 고등부는 220명,
대학 청년부는 60명으로 발전하여 총 1,200여 명의 신자로 발전 하였고, 그 당시 성가대
지휘자는 오만세, 반주자는 정정자 였습니다.
2. 분열 되었든 교단이 1965년 7월23일에 “합동 총회”가 실시되어 필자는 행정 목사로 이 일 을 적극 도왔습니다. 합동 총회 시 병석에 계신 “이성봉 목사”께서 나오셔 “죽음으로 말씀 을 증거 하겠다”는 내용의 설교는 영원히 남는 설교 였습니다.
이성봉 목사께서는 설교 후 10일 후인 1965년 8월 2일(6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 셨습니다. 합동운동은 계속 되어 1973년 7월에 신촌교회에서. 1974년에는 중앙교회에서 3 차 합동총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성 240여 교회 중, 200여 교회가 합동).
3. 1966년 경 에는 중 고등부 학생들이 발전하여 250여 명이 모였고 여기에는 박영규 부장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4. 교회 월보 사 에서 1965년 6월 13일에 “교회와 청년과 대화”라는 주제의 기사가 있었는데 청년부에서는 “최영기, 권영필, 오이세” 교회측은 “이기홍, 김백수”이고 월보사 측은 “박요 한 김종원” 이였습니다. 이 대화로 서로의 격차를 줄이고 교회 발전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봉사하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5. 1965년에 “한일 회담 반대”가 일어났을 때 본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가 열렸을 때에 필자 는 “교회와 나라가 바로 서려면 기독교인들이 먼저 회개 하고 바르게 살 것”을 설교에서 강 조 했습니다.
6. 처음으로 “주보 개인함”을 설치했습니다.
7. “대 심방”으로 성도들의 가정 실태를 조사 했습니다.
(전화 소유 가정-32가정. 자택 소유가정-122호, 관사-11호, 전세. 삭 월세 집-158가정,
판자, 천막 우막 집-70가정 임. 1960년대는 한국이 어려운 때 였음)
8. 개척 교회 선교비 지원교회는 “도봉, 양구, 대방, 홍제, 금화산 교회 입니다.
9. 1967년 3월 26일 주일에 처음으로 주일 낮 예배가 1,2부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10. 교회 앞 공간에 임시 별관(16평)을 건축하여 “친교 실”로 사용 했습니다.
 
아현 교회에서 사역 시 장로들은 “이성구, 박용장, 김인기, 이명구, 이성원, 서병우, 강장성, 김용의, 김백수, 김태영, 이계무, 이익제, 박영훈, 홍종서, 이석규” 장로들이며. 권사는 “이영희, 이경옥, 김봉희, 최경숙, 신연희, 홍기남, 황태희, 나옥선, 남은숙, 이종아" 권사 들입니다.
 
부 목사의 할 일과 유의 할 점.
1. 담임 목사를 잘 보좌 하여야 한다.
2. 교회 행정을 배워 행정으로 교회질서를 확고히 하여야 한다.
3. 모든 일에 칭찬은 담임 목사가 받도록 하고, 부목사는 겸손 하여야 한다.
4. 교회 분쟁에 가담하지 말고 담임 목사 편에 서야 한다.
5. 교회갈등이 생기면 화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6. 교회행정, 심방, 구역 활성화, 기관 협조, 상담 등에 최선을 다한다.
6. 담임 목사의 대외 활동의 스케줄을 조정한다.
7. 담임 목사의 영적 리더쉽, 설교, 목회를 잘 배워야 한다.
 
오영필 담임 목사.
아현교회에서 4년간(1965-1968) 오영필 목사를 모시고 사역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필자의 스승 중 한분으로 다음의 모습을 생각 하게 합니다.
 
1. 성서 대 학자 이십니다.
오영필 목사께서는 1905년 1월 11일에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 하시어 유시부터 한문을 배우 시고 동화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셨습니다. 1927년에는 일본 나고야에 있는 “중경 법률학 교”에서 수학하고 1936년에 경성성서 학교(현 서울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헌신 하게 되었 고 그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설교 시는 한학을 바탕으로 원고 설교를 하셨으며 새벽 기도 회는 “성서 강해”로 성경을 매일 한 장식 읽었습니다.
1962년에 “꿈에 본 포도나무”(설교 집)를 발행 했으며, 영남고등학교 교장(1952-1957), 수도 성서신학교 교장(1966-1969), 서울 신학대학 강사(1959-1982)로 일하였습니다.
 
2. 영혼을 사랑 하셔서 교회를 개척 하였습니다.
193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44년 목회생활에 13개 교회(유성, 현도, 노성, 공주, 광정, 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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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숭인, 동인, 현풍, 광숭, 상월, 장벌리, 애린교회) 등입니다. 지금은 이 교회 중에 큰 교회로 성장한 교회도 있습니다.
 
3. 성결교회 지도자입니다.
원래 과묵하시고 실력이 있으신 분으로 충서 지방회장, 경북 지방회장등을 여러 번 역임 하셨고, 1945년 해방 후에 교단 총회에 임원을 거져 1958년에는 교단 13회 총회장으로 선 임되셔 14회, 18회 등 총회장 3회를 역임 하셨습니다. 1962년에 교단 유지재단 이사 장, 1964년에는 서울 신학대학 이사장으로 여러 해 수고 하셨습니다.
아현교회에서 20년간 목회 하시다가 1976년에 “원로 목사”가 되셨습니다.
 
4. 날카로운 이단 비판자입니다.
1960년대는 한국교회가 이단 문제로 시끄러운 때 였습니다. “박대선 장로. 통일교 문선명” 등으로 성도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오목사께서는 매 주일 설교 시에 성서적인 면으로 사이비 이단을 비판 했습니다. 더우기 서대문에 있는 “순 복음 교회”가 지나치게 “신비, 방 언”등으로 나아감으로 교회는 성서적으로 건전하게 서야 함을 강조 하였습니다.
성도는 “열심히 믿는 것도 필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믿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한국교회가 123년의 선교 역사가 있지만 두 가지 조심 할 일은 “ 첫째, 교회 분쟁이고
둘째, 건전치 못한 교리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5. 어려움이 있을 때는 “금식 기도”로 해결 했습니다.
구약에 장기적인 “금식기도”가 있으며(레 16:26, 민 29:7, 렘 36:6 ) “다윗”도 금식기도(삼 하 12:6, 21-23)를 했으며 “안나”는 주야로 금식을 하였으며(눅 18:12) "예수"께서도 40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마4:2 ) 오영필 목사께서는 “교회에 어려운 일, 성도들 사이 에 갈등, 시험에 드는 일, 억울한 일, 섭섭한 일, 구설수에 오르는 일”등이 생기면 심방, 상 담, 변명보다도 자신이 부족함을 먼저 생각하고 “3일 간 금식 기도”를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기도 하면 대부분 해결 되었습니다.
 
오영필 목사는 1934년 3월 14일에 80세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아현 교회에서 사역 시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는데 귀한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이제 성장하 여 결혼(권 성연집사)하여 두 남매(재환, 재원)를 두었으며 현재는 한국 미 8군 병원에서 근 무하는 검안 닥터(O. D.) 이병덕 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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