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일 일요일

(인물 소개) 건국 대통령 우남 리승만 박사


 
 
(인물 소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리승만 박사
(Syngman Rhee 1875년-1965년)
 
양녕대군 의 16대 손 인 이승만 박사(우남)는 고종 1875년 3월 26일에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대동 에서 부친 이경선 씨(1839-1912, 유교적 선비) 와 모친 김해 김씨(1833-1986) 사이에 3남 2녀 막내 아들로 출생 하셨습니다.
아명은“승용”이었고 손 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6대 독자 이십니다. 리승만은 15세 시에 박승선씨와 결혼하여 7살의 아들이 사망한 후에 두분은 헤여지는 앞음도 있었습니다.

리승만 박사는 미국의 초대 “죠지 워싱턴” 대통령 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국부이며 민족의 지도자 이십니다. 서울에서 미 북 감리교 “헨리 아펜셀라 선교사”의 영향을 받고, 1895년 4월 2일에(20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학업에 힘썼으며 학창 시절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배재 학당에서 공부 중에 영어에 재주가 있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노블, 올링거, 애비슨” 박사등을 통하여 서구 문화와 역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주시경(한글 학자)”, “서재필 박사”와도 친분을 가졌습니다. 졸업 후에 1898년에“매일 신문. 제국 신문, 협성회보”를 발간하여 러시아의 이권 창달을 날카롭게 비판 했습니다. 1899년 독립협회에서 개혁운동을 하다가 반 정부 운동 혐의로 5년 7개월간(1899-1904) 옥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성경을 읽고 더욱 신앙심이 강하여 졌습니다. 옥중에서도 전도, 교육, 저술활동에 힘을 썼습니다. 특히 “독립 정신”이란 책을 저술 하셨습니다.

“독립 정신”에 “독립 정신 6대 실천 강령”이 있습니다. 6대 강령
1. 우리는 세계에 대하여 개방 하여야 한다.
(세계와의 교류,통상은 서로의 유익, 통상은 나라의 부강, 외국인의 방문은 서로의 유익, 외국인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야 함)
2.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가정,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
(외국인들과 함께 거주, 새로운 학문에 대한 공부, 외국인들의 경제 침략에 조심, 신학문에 대한 혜택을 누림)
3. 외교를 잘 해야 한다.
(외교는 나라 유지에 두움, 외국을 공평하게 대함, 외국의 그룹에 속함, 진실외교 가 중요, 부족한 외교는 진실로 회복)
4.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의 법을 지킴, 부지런하고 열심히 함, 나의 국가를 존중, 외국 국적을 갖는일 은 조심, 외채를 갖는일에 조심)
5.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감정을 잘 표현, 공적인 의무를 함, 나라 충성에 용기)
6.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자유를 자기 목슴 같히 여김, 타인의 권리를 존중,)
“독립 정신” 끝에 “우리는 기독교를 모든 일에 근원으로 삼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어 나라를 한 마음으로 받들어 우리 나라기 영국과 미국 처럼 동등한 수준에 이룰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서술 하였습니다.(1904.6.29 기록)

리 박사께서는 1904년에 특사로 출옥하여 “민영환”의 도움으로 1905년 미국 가서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 하였으며 조선 독립 운동”에 노력 했습니다. 그 후에 유학중에 “햄므리”목사에게 세례를 받었습니다. 1907년에 죠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 하셨고, 그 후에“하바드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수학 하였고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가 1910년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함으로 국제 정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한국인으로써 최초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덴버에서 ”애국 대표자 회의“의장에 선임이 되었으며, 회의에서 연설을 할 때에 많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리박사는 가는 곳 마다 세계정세를 파악하였으며 일본의 조선침략을 규탄 했습니다. 1910년에 LA에 와서 ”독립 정신“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2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Y.M.C.A."에서 학감으로 일하면서 애국 사상을 고취 시켰습니다. 1912년 다시 미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전개 했으며 1913-1939년 사이에는 “하와이”를 근거지로 하여 “민족교육과 독립 운동”에 힘을 썼으며 세계 만방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1918년에는 “하와이”에서 “한인 기독학원. 한인 기독 교회”를 창립 하였습니다. 상해에 가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 총리로 선임이 되어 독립 운동에 직무를 다 했습니다. 다시 하와이에 입국하여 “대한 동지회”를 조직하고 활동 했으며 조선 독립을 주장 했습니다.
1932-1933년 사이에는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조선 독립을 역설 하기도 했습니다. 유영익교수의 “리승만의 삶과 꿈”이란 책에서 “리승만은 유능한 언론인 학자형 정치가이며 수준 높은 정치 지도자이며, 집필자이며, 개혁자이며,보수적 사상을 갖인자이다”라고 언급 하였습니다.
1933년 제네바에서 “프란체스카”를 만나 1934년에 뉴욕 “몬트 클레어 호텔”에서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흠즈 목사의 합동주례로 결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인은 34세였고 리박사는 57세 였습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영,불어 통역관, 속기사, 타자의 특기가 있어 리박사를 옆에서 많이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평생 리박사께서 책을 쓰거나 연설문을 작성 시에 원고 교정, 타이핑에 크게 수고를 하였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겨 국제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민족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이곳에서 “미국의 소리”방송을 통하여 조선 독립의 희망을 알리고 미“루스벨트”대통령과 영“처칠”수상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 했습니다.
리 박사는 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해방되자 그 해 10월16일에 망명 33년 만에 귀국하여 “독립협성 중앙 위원회”를 결성하고 “신탁통지 반대”에 앞장섰고 미국에 “자유민주주의의 한국 정부수립”을 호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소련군과 김일성의 방해공작, 미 군정의 좌우 합작정책,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의 파업과 폭동, 김규식 김구와 같은 남북 협상파들의 반대와 싸워야 했습니다. 1945년 12월19일 “KBS 방송”에서 “공산 주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 했습니다. “공산당 극렬 분자 들은 자기 나라를 파괴시키고, 독립권을 말살 시키는 자이다,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어서 인민을 속이며, 당파를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민주주의라고 속이고 있다. 이 극렬 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 국가“를 없이하고, 노예를 만들어 사욕을 채우려는 것이다. 이 분자들은 ”러시아“를 우리 조국이라고 부르니 이것은 결코 허락하자 않는 곳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슴을 내어 놓고, 싸워여 할 것이다. 우리들은 이 들에게 사실을 알려 주어여 하며, 내용을 모르고 따라다니는 자들을 권유하여 돌아서게 해야 한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하지 못한다. 파괴자는 회개 하기 전에는 서로 협동 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 자들은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함께 살수 없다, 그리고 매국 세력이다“라고 설파 하였습니다.
리박사는 끝으로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누워지고, ”동족 상쟁“의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리들은 남의노예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합심하여 ”민주 정체“하에 국가를 건설하고,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고 강력히 호서 했습니다.
리 박사께서는 1948년 5월 10일에 UN의 결의에 따라 선거로 “제헌 국회위원”(200명)을 선임 하였습니다. 국회 개회사에서 리박사는 "한인 공산당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니 개과 회심하여 전 민족이 주장하는 국권 회복에 협력하면, 다 같이 선량한 동포로 대할 것이요, 회개치 못하고 살인, 방화, 파괴 등을 자행하면 국법으로 처단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기위하여 법에 복종하여 자유를 누리는 여러 동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동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 되었습니다. 7월 20일에 리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하였고 1948년 8월 15일에는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리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 취임식과 정부수립을 공포 했습니다. 당시 국무총리는 이범석 장군 이였습니다.
리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이 대통령의 직책은 나 한사람의 힘으로 성공 할 수 없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들의 협력만이 가능 합니다. 나는 공산당의 매국 주의를 반대하며 북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하루 속히 회심 개과 하여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이루어 모든 복리를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948년에 12월 11일에 한국은 피리에서 열린 U N총회에서 승인(48;6)을 얻게 되었고 1949년에는 한국 신 정부가 세계 25개국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 수립 전 국정 3년 동안에 미국 원조 액수는 2억 3,000만 불 이었습니다.
1949년에는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 했고 그 해에 중국 장개석 총통과 “반공 연맹”을 결성하는데 합의를 했으며 1950년 일본에서 “맥아더”장군과 한국의 안보를 논의 한 바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1948년 9월9일에“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 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을 감행하여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시 한국이 위기에서 구원 받게 된 것은 리승만 대통령의 평소 미국과의 관계에서 미국과 U.N.의 도움을 받게 된 때문입니다.
 
특별히 1950년 8월 16일의 낙동강 반격은 하나님의 도움 이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미 25사단,24사단, 영 27사단, 한국군 1사단이 참여 했으며 미 B-29 폭격기 95대가 왜간 지역 인민군 부대에 융단 폭격을 할 때 날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9월15일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U.N.참전 17개국의 함정 261척과 한국군 해병대 2개 대대, 한국 육군 17연대, 미 1해병사단, 미 1군단의 합동으로 성공 하여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여 중앙청에 태국기를 계양 하였습니다.
한국군과 UN군은 북진하여 1950년10월에 평향을 탈환하였습니다. 10웡29일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 시민들이게 “이북 동포 여러분 나와 같이 결심 합시다. 공산군이 어디서 들어오든지 그것이 쏘련이건 중공이건 들어오려면 들어오노라. 우리는 죽기로 싸워서 물리치며 이 땅에서는 발 붙이고 살지 못할 것을 세계에 선언 합니다”라고 연설 하셨습니다.
6.25 전쟁 시 미군의 희생이 컸습니다. 미군 전사자는 54.246명, 부상자는 103.283명, 행방불명자는 8.126명 이였습니다.
1950년 10월30일에 중공군 20여 만 명이 개입하여, 다시 한국 군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1952년 8월 29일 UN군은 1.080대의 항공기로 평양 군사시설을 대 폭격을 감행 하였습니다.
그런 후 1953년 7월 27일에 남, 북한이 전쟁을 종결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 하였습니다.
12년의 통치기간에 임명한 장관급 인사 중에 거의 절반이 개신교 신자입니다.
국기배례를 주 목례로 결정 하였고, 감옥 전도를 위하여 “형목 제도”를 도입하였고, 1957년에는 개신교의“기독교 방송국, 극동 방송국”의 설립을 허가 하였습니다. 6.25 전쟁 후에는 병사들의 신앙을 도와주기 위하여 “군목제도를 창설 하였습니다.

리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는.
1. 한국을 봉건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바꾸는데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2.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3. 6.25 전쟁 시 북한의 침략으로 위기 가운데서 미국과 U.N.에 호소하여 나라를구원 하였습니 
     다. 리박사는 확실한 반공주의자 임으로 북조선이 남한을 공산화 시키지 못했습니다.
4. 1953년 10월 1일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 하였습니다.
5. 교육입국을 주장 하였습니다. 미국의 기술 원조로 인재를 양성 하고, 각 대학을 현 대 교육으
     로 활성화 시켰습니다.
6. 군목제도를 창설하였습니다.(해군-1950.11.10.육군 -1951.1.27.공군-1952.210)
7. 여성인권을 존중하며, 여성권리를 보호하는 운동을 전개 했으며, 하오이에서 독립 운동당시
    에 여성제자들을 많이 배출 했으며, 초대 내각에서“여성장관”을 임명 하 였습니다.
8. 훌륭한 신앙인 입니다.(1차 국회 개회 시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하게 하였고 정동 제일감
    리 교회 명예장로로써 매일 성경 읽고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 하셨 습니다. 신앙은 보수적
    이고 “세계교회 협의회(W C C)를 비판 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25일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
    가 불리 할 때에 정동교회에 가셔서 하나님께 간절 히 기도 하셨습니다.
 
리승만 박사의 검소한 생활은 평소의 생활 습관 이였습니다. 리박사께서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 주인이 되었을 때 첫 봉급을 아내에게 주면서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분수에 맞게 생활하라”고 권고했으며 스스로 근검절약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경무대는 일본인 미나미 총독이 지은 협소한 건물 이여서 불편한 점이 많았으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개조하지 아니 했습니다. 리박사는 겨울에도 경비를 절약하기위하여 난로도 피우지 아니하고 온 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해외 순방시도 영부인을 대동하지 아니한 것은 절약을 위한 일입니다. 경무대 정원의 나무들을 손수 정지하고 가꾸는 일도 하셨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6월27일 경무대를 떠날 때 금고에 5만원(지금 화패 가치로 2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이다,
1951년 부산 피난 임시관저에서 생신 때 미역국과 쌀밥 이외는 음식을 만들지 말라고 지시
 했습니다.
전쟁 중에 유서를 써 가지고 있었는데 유서에는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이다, 나는 자유와 민주 제단에 생명을 받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국민들은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가 없어 선영에 죄지은 불효 일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한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하나님, 이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 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 하셨고, 한 밤에 맥아더장군에게 전화를 걸 때 부관이 지금 취침중이니 낮에 전화를 하시라고 할때 “지금 우리 국민이 다 죽어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시고 전화를 걸으셨습니다.
 
1935년 미국에서 독립운동 중에 서울의 남산을 그리워하며 쓴 시가 있는데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지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 뿐“입니다.
 
아쉬운 점은 인의 장막에 가리워 1960년 부하들(이기붕 국회의장.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나 리승만 박사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4.19. 전 날 새벽에 이기붕 가족은 장남 이강석 소위에 의해 온 가족 4명은 권총 자결의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이화장”에 조용히 계시다가 하와이로 이주하여 5년 2개월을 사시다가 1965년7월 1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영원히 남는 유언이 되었습니다.
 
부인“프랜 체스카”여사는 평생 겸손하고 정결한 여인으로, 비서로, 친구로, 내조자로 이승만 박사와 함께 했습니다. 여사는 국제적으로 오는 편지를 분석하여 보고하여 드리고, 그 답을 직접 타이프 하여 보내고 최상급 비서로, 정치적 동반자로 일 하였습니다. 리박사는 74세 때 대통령으로 취임 하시게 되어 여사께서 주치의 이상으로 건강을 돌보아 드렸습니다. 여사는 한식을 잘 하셨으며 “육식을 피하고, 채식, 생선 류, 물 김치, 콩 나물, 두부, 김, 된장 찌개,콩 자반, 북어 국, 북어 찜,”등이 경무대의 단골 메뉴 이였습니다. 여사께서“리박사는 웃음을 잃지 않고 분노의 마음을 갖지 아니했다, 남편은 유머가 풍부 했고, 모함과 중상을 하는 자 에게도 늘 관대 했다, 항상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늘 젊은이처럼 활기 있게 살았다, 그의 신념은 남북통일 이다, 리박사는 헛된 욕심이 없고 평안한 마음가짐과 절도 있고 규칙적인 생활습관, 균형 있는 식사,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고 말 했습니다.
 
프랜 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19일에 92세 일기로 타계하여 그의 관 속에는 “남편이 독립운동 때 사용 했던 태극기와 성경이 넣어 졌고 관 위에는 남편의 친필 휘호인 남북통일을 쓴 천을 덮었습니다. 1992년3월23일에 정동감리교회 주간으로 장례식이 이루었으며 남편 리승만 대통령이 누워 있는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안장 되었습니다. 여사는 12년간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2년간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7년간은 남편 없는 땅에서 한국 할머니로 살았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언제나“공 과”가 있을 수 있으나 리승만 박사께서는 대한민국에 크게 공헌 하였으므로, 온 국민이“국부”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1996년에 사단법인 건국 대통령 리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 되었습니다.
하루속히 “리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한국에 세워져 현재 서울“이화장”에 남아 있는 모든 리박사의 유품을 잘 정리하여 후대에 영원히 남겨야 할 것입니다.
                                                       (목사 이기홍 제공)
 
 
 
 
 
 
 
 
 
 
 
 
 
 
 
 
 
 
 
 
 

댓글 없음:

댓글 쓰기